[천병혁의 야구세상] 한일의 MLB 진출 통로 '포스팅시스템'을 개척한 이상훈 01.08 10:00
(서울=연합뉴스) 천병혁 기자 = 김혜성(25)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하는 과정에 거쳤던 '포스팅시스템'(Posting System·비공개 경쟁입찰)은 1990년대 후반 한국과 일본 선수가 미국 메이저리그(MLB) 진출에 혼선을 겪은 뒤에 탄생한 제도다.
한국 선수로는 1994년 초 아마추어 신분이던 박찬호가 최초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하고, 1995년 12월에는 해태 타이거즈(KIA의 전신) 선동열이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로 임대 이적했다.
하지만 KBO리그에 자유계약선수(FA) 제도가 없던 시절이라 국내 선수가 메이저리그 팀으로 이적하는 규정조차 없었다.
한국보다 역사가 긴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1964년 난카이 호크스(소프트뱅크의 전신) 소속으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싱글A에서 연수하던 유망주 무라카미 마사노리가 그해 8월 빅리그로 깜짝 승격해 일본인 1호 메이저리거가 됐다.
두 번째 일본인 메이저리거는 1995년 다저스 입단해 신인왕을 차지한 노모 히데오다.
노모는 1994시즌 뒤 일본 소속팀 긴테쓰 버펄로스와 연봉협상 과정에 마찰을 빚다 '임의탈퇴' 되자 미일협정서의 허점을 파고들어 곧바로 다저스와 계약을 맺었다.
1997년 초에는 일본 최고의 강속구 투수였던 이라부 히데키의 소속팀 지바 롯데 머린스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트레이드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라부가 뉴욕 양키스 입단을 강력하게 희망하면서 삼각 트레이드 방식으로 줄무늬 유니폼을 입게 됐다.
이처럼 통일된 이적 절차가 없는 가운데 LG 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이상훈이 1997시즌이 끝난 뒤 미국 진출을 전격 선언했다.
KBO리그에서 정상급 투수로 활약하던 이상훈은 "메이저리그든, 마이너리그든 미국에서 도전해보고 싶다"며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LG 구단은 고민 끝에 선동열처럼 '임대 형식'으로 이상훈을 보내기로 했다.
LG는 그해 12월 보스턴 레드삭스와 2년 임대료 250만달러, 연봉 220만달러 등 총 470만달러에 임대 방식의 트레이드를 맺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해를 넘긴 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메이저리그 커미셔너 사무국이 LG와 보스턴의 트레이드에 제동을 건 것이다.
이라부의 이적 과정에서 혼선을 겪은 메이저리그는 이후 'FA가 아닌 일본 선수의 미국 구단과 직접 트레이드를 전면 금지한다'고 결정했고, 한국과 대만에도 이를 확대 적용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메이저리그는 한국과 일본 선수를 영입할 때는 30개 구단이 동일한 조건에서 영입 경쟁을 하는 '포스팅시스템'을 거쳐야 한다는 방침까지 정했다.
결국 보스턴으로 트레이드가 무산됐으나 미국 진출 희망을 접지 못한 이상훈은 '포스팅시스템' 1호 신청자로 다시 도전했다.
30개 구단의 공정한 평가를 받기 위해 3월 중순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애리조나주 글렌데일에서 각 팀 스카우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테스트도 했다.
그러나 포스팅 마감일인 3월 31일 새벽 팩시밀리를 통해 KBO 사무국에 접수된 최종 포스팅 결과는 고작 이적료 60만달러였다.
애초 보스턴이 제시한 이적료의 4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금액에 실망한 이상훈과 LG는 미국 진출을 포기했다.
대신 이상훈은 일본 주니치로 이적해 2년 동안 선동열, 이종범과 함께 뛰었다.
1999시즌에는 주니치를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끈 뒤 다시 미국 진출을 시도해 FA 신분으로 보스턴에 입단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2시즌 동안 9경기에서 11⅔이닝만 던지며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3.09를 기록한 뒤 KBO리그로 돌아왔다.
비록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야생마'라는 별명처럼 강렬했던 이상훈의 도전 정신이 한일 프로야구 선수들의 미국 진출 창구가 된 새로운 규정까지 만들었다.
그 길을 따라 류현진과 강정호, 박병호, 김광현, 김하성, 이정후 등에 이어 김혜성까지 수많은 후배가 꿈을 좇아 태평양을 건널 수 있게 됐다.